1

  

굴욕감을 맛보았다.

 

유연은 주먹을 꽉 쥐고 소파를 퉁, 내리쳤다. 푹신한 소파에 동그랗게 패여 들어간 주먹이 도로 통, 떠올랐다. 타격감이 도무지 느껴지질 않아 유연은 벌떡 일어나 테이블에 다시 주먹을 내리쳤다. 퍽. 손은 아팠지만 보람은 있었다. 때로는 울분을 몸으로 표현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머리통이 수류탄처럼 팡 터져버릴 것이다. 유연은 한 번 더 테이블을 내리쳤다.

 

분하다!

 

무엇이?

 

그 기지배가 내 앞에서 꼴값을 떨었던 걸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

 

얼마 전 부티크 숍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 얘기다. 여전히 무지하게 얄미운 기지배였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어찌나 남자애들한텐 내숭 잘 떨고 자기 눈에 안 꾸민다 싶은 여자애들은 무시하는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바로 걔가 말을 걸었다. 유연이 마음에 쏙 든 원피스 하나를 옷걸이 째 꺼내 들었던 순간에,

 

“어머! 너 유연이 아니니? 웬일이야. 여기서 다 보네!”

 

처음엔 몰랐다. 그러나 그 여성이 쓰고 있던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밀어 올리자 딱 알아봤다. 별로 반갑지는 않았으나 유연은 의례적인 사회성을 발휘하여 0.01초 내에 떫은 마음을 쪼개어 내고 놀랐다는 듯 웃음 지어 보였다.

 

“와, 정말. 깜짝 놀랐네!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유연이 넌 요즘 어떻게 지내? 뭐 하느라 동창회에 한 번을 안 나와. 애들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동창이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유연은 그냥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대학 졸업을 일 년 남겨둔 채 아버지가 쓰러지고, 그 경황없는 가운데 혼자 기획사를 지탱하기 위해 고군분투 해 왔다. 그 힘겹고 복잡다단한 상황에서 팔자 좋게 동창회에 나가서 웃고 앉았을 수는 없었다. 그야 그리운 얼굴들을 보면 기분전환이 됐을지 모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니까. 예를 들면 이런,

 

“근데 유연이 너, 좀 살찐 것 같은데?”

 

……상황을 겪을 수 있었으니.

 

“아, 그런가?”

 

유연이 애매하게 대답했다. 동창이 냉큼 말끝을 잡아챘다.

 

“그래. 얼굴선 동그래진 것 좀 봐. 혹시 아직 젖살이 안 빠졌나?”

“음, 그럴지도…….”

“하긴 그런 게 귀엽다고 남자애들이 난리였었지. 근데 아직도 이럴 줄은 몰랐네.”

 

왠지 혀를 차는 말투다. 뭔가 유연의 성장 발달이 아주 미비하고 미성숙하며 문제가 있다는 것처럼.

 

“거기다 이 다크 서클 좀 봐. 피부도 옛날엔 그렇게 깐 달걀 같더니 지금은……. 어떡하니, 관리 안 해? 내가 다니는 피부 관리실 소개해 줄까?”

“……아냐, 됐어. 시간도 없고…….”

“시간이 없다니 왜, 관리는 해야지.”

“아냐, 요즘 야근도 많고…… 많이 바빠.”

 

유연이 얼버무렸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유연은 요사이 일 때문에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따라서 수면시간이 불규칙하고 식생활도 불량했으며 운동은 꿈에도 못 꿨다. 스트레스를 좀 풀어 보려고 오늘 잠깐 시간 난 김에 쇼핑하러 온 거였는데, 이런 난데없는 불상사를 만날 줄은 몰랐다. 유연은 이 여우 같은 기지배가 제발 좀 빨리 꺼져주길 바라며 애써 웃는 낯을 만들어 보였다.

 

“사실 오늘도 빨리 들어가 봐야 되거든. 그래서…….”

“앗, 그래? 지금 가봐야 되는 거야? 그럼 네가 집은 그 옷 나 좀 봐도 돼?”

“뭐? 이거?”

 

유연이 자기 손에 들린 원피스를 내려다보았다. 사랑스러운 로즈핑크의 미니 드레스. 유연의 마음에 쏙 든 것이었다. 200% 자신에게 어울리리라 확신하며 골라 든 것인데.

 

“그게, 미안하네. 내가 살 거라서. 이거 하나밖에 안 남았다네.”

“아, 그래?”

 

동창의 눈초리가 샐쭉해졌다. 유연은 속으로 고소해했다. 흥, 내가 양보해줄 것 같아? 이건 너보단 나한테 잘 어울릴 거란다, 이 여우 같은 것아.

 

그러나 동창은 팔짱을 딱 끼고 서서, “근데 너한테 맞겠어?” 하고 무례한 말을 던졌다. 유연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

“아니, 유연이 너 좀 살이 붙었잖아. 눈대중으로 보니까…… 넌 한 사이즈 큰 걸로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아니거든? 이게 내 원래 사이즈야.”

“아닌데…… 아무리 봐도…….”

“하하.”

 

유연은 경련을 억누르며 안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한번 입어볼까?”

“시간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냥 입고 가지 뭐.”

“응, 그럼 입어 봐. 내가 한번 봐줄게.”

 

동창이 선심 쓰듯 말했다. 유연은 옷을 들고 피팅룸으로 성큼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심호흡을 한번 했다. 입고 있던 편한 블라우스와 헐렁한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 원피스의 지퍼를 열고, 두 다리부터 집어넣었다. 원피스를 위로 붙잡아 올렸을 때 유연은 불길함을 감지했다. 옷이 몸의 중간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유연은 숨을 훅 들이마셔 배와 갈비뼈를 최대한 오므라들게 한 후에 원피스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갈비뼈가 죄어들었으나 두 팔은 무사히 꿰었다. 이제 등 뒤의 지퍼를 올리면 되는데…… 안 돼. 설마. 이럴 순 없어. 올라가던 지퍼가 멈춰서 옴짝달싹도 안 했다. 아냐. 말도 안 돼. 이건 내 사이즈라고!

 

지퍼를 끝까지 올리기 위해 묘기 부리는 서커스 단원처럼 두 팔을 이리저리 뒤틀어 대다가 피팅룸 사방 벽에 텅, 텅 팔꿈치가 부딪쳤다. 똑똑똑. 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유연아, 무슨 일이야? 전쟁이라도 났니? 혹시 지퍼 안 올라가는 거면 내가 도와줄까?”

 

웃음기 어린 목소리. 유연은 정수리 뚜껑이 열리는 것 같았다. 몇 분을 더 땅에 던져진 뱀장어처럼 몸을 뒤틀어 봤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어떻게 용을 써도 지퍼는 끝까지 올라가지 않았다. 결국 유연은 눈물을 머금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묵묵히 원피스를 벗고 원래 옷을 다시 입었다.

 

유연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피팅룸을 나왔다. 핑크로즈 드레스는 팔에 걸친 채였다. 동창이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머, 왜 안 입고 나왔어? 안 맞아?”

“……아, 지퍼가 좀 고장 났더라고.”

“그럼 안 되지. 불량이라고 말해야겠다.”

“내가 할게.”

 

유연은 카운터에 가서 직원에게 지퍼가 고장 났다고 말하는 대신 그 옷을 결제했다. 동창이 어깨 너머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지퍼 망가진 걸 왜 사?”

“수선에 시간 걸리니까. 됐어, 내가 하면 돼.”

“그래도 그렇지. 수선비도 드는데 아깝게. 너 그렇게 바쁘게 일하는 게 다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야?”

 

동창이 호들갑스럽게 참견했다. 유연은 이를 악물었다. 직원이 “지퍼가 망가졌나요?” 하며 옷을 들춰보려는 걸 유연이 황급히 말렸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수선해서 입을게요. 진짜 괜찮다니까요. 문제 있으면 다시 올게요.

 

그리고 동창과 함께 부티크를 나왔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동창은 유연과 가는 길이 반대 방향이었다. 안도함도 잠깐, 동창이 웃으며 말을 던졌다.

 

“반가웠어, 유연아. 너 많이 변한 모습도 보고. 세상 재밌다, 얘.”

“아, 응. 재밌네.”

“다음 동창회 기대된다. 애들이 네 소식 많이 궁금해 했거든. 너 만난 얘기 해줘야지. 유연이 넌 이번에도 못 오지?”

“……갈게.”

 

유연이 단호히 말했다.

 

“어, 정말?”

“응. 이번엔 꼭.”

 

이 여우가 나 없는 데서 무슨 말을 퍼뜨릴지 눈에 훤히 보이니 죽어도 가야지.

 

“약속하는 거지? 그럼 애들한테 전해놓을게. 웬일이야. 이번에 유연이 온다고 하면 애들 다 모이겠는데?”

 

호호호 웃으며 동창이 이마의 선글라스를 내려 썼다. 큼직한 안경알이 햇빛에 번쩍 빛났다.

 

“그럼 이주 후에 봐.”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여우가 멀어져 갔다.

 

유연의 팔에 걸린 쇼핑백이 바람에 펄럭였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핑크로즈 드레스.

 

반드시 입고야 말겠다.

 

 

 


2

  

그리하여 유연은 자신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기한은 2주.

 

그렇게 단기간에 살을 빼기 위해서는 일단, 안 먹어야 한다. 먹어도 풀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백기 선배와의 저녁식사 때 자기 몫으로 샐러드를 시킨 이유였다.

 

“그거 하나만? 왜?”

 

백기가 놀라 물었다. 왜냐면 유연은 절대로 샐러드를 단품으로 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샐러드란 늘 메인 디쉬(고기)에 곁들이는 사이드 음식이었다.

 

“이것만 주세요.”

 

유연은 꼿꼿이 등을 편 채 웨이터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 음료도 됐어요. 물 주세요. 웨이터가 메뉴판을 들고 테이블을 떠난 후, 유연을 쳐다보는 백기의 양 눈썹에 근심이 어렸다. “그것만 먹고 배고프지 않겠어?” 묻는 말에 유연은 의연히 대답했다.

 

“다이어트 중이거든요.”

“……다이어트?”

 

백기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런 거 할 필요가 있어?”

 

백기는 언제나 유연이 좀 더 잘 먹고 더 튼튼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유연이가 복스럽게 잘 먹는 모습을 무척 좋아하는 데다, 그 애한테 군살 같은 게 붙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그러나 유연은 눈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선배는 몰라요. 지금까지 입었던 사이즈가 안 들어갈 때의 그 기분!”

“음…….”

 

백기는 확실히 몰랐다. 지금까지 과체중이 된 적도 없고, 매일같이 몸을 단련하니 앞으로도 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유연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곧 죽어도 지퍼가 끝까지 올라가게 만들어야 돼요. 그러고야 말 거야!”

“한 사이즈 큰 걸로 사면 되지.”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는 이주 후에 동창회가 있다는 거예요.”

“동창회?”

“나 고등학교 때 반 애들 동창회.”

 

일시와 장소가 적힌 초대 메일이 오늘 정식으로 도착했다. 그 여우 같은 기지배가 보낸 것이었다. 기지배는 너무 무리할 건 없다며 바쁘면 오지 않아도 된다고 웃는 이모티콘까지 곁들여(더 빈정 상하게) 보냈지만, 유연은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유연은 요전 날 부티크 샵에서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들려주며 자신의 결의를 피력했다.

 

“그 기지배한테 내가 보여주고 말 거예요. 연모고 퀸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자기 입으로 <연모고 퀸>이니 하는 것은 몹시 낯 간지러운 일이었지만, 그간 백기와 허물없이 친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언사였다. 유연은 그가 자신의 모든 언행을 담담하고 포용력 있게 받아들여 준다는 사실을 체득했다. 백기 선배는 대범하고 관대한 남자였다. 고등학생일 적엔 몰랐던 사실이다.

 

드디어 음식이 나와 유연은 샐러드를, 백기는 폭찹을 앞에 두었다. 유연은 전투적으로 양상추며 루콜라며 방울토마토를 아삭아삭 씹어 삼켰다. 백기는 걱정이 되는지 연신 힐끔거리며 커다란 폭찹 덩어리를 잘라 유연의 접시에 얹어주려 기회를 노렸다. 눈치챈 유연이 한 손을 들어 엄숙히 막았다.

 

“선배 먹어요. 난 참을 수 있어요.”

“……응.”

 

늘 유연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그는, 그 애가 하고 싶다니 더는 입을 대지 않았다.

 

다만 안타까운 눈으로 그 앨 지켜볼 뿐이었다.

 

이후 열사흘 동안 그 애는 자신의 의지를 충실히 실천하여 아침에는 곡물 셰이크 같은 걸 마시고, 점심은 두부랑 달걀과 과일 같은 걸 먹고, 저녁은 샐러드를 먹었다. 매일매일 마셨던 직장인의 낙 달콤한 카페라테도 끊었고, 신제품으로 나온 초콜릿 크림 프라푸치노도 침 흘리며 바라만 봤고, 하루종일 틈틈이 집어먹던 초콜릿도 사탕도 쿠키도 빵도 포기했다. 인고의 시간이었다.

 

결전의 날을 하루 앞둔 저녁때, 백기가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선배!” 하고 유연이 그날 하루 중 가장 밝은 얼굴이 되어 달려왔다. 화단에 걸터앉아 있던 백기가 일어서며 말했다.

 

“다행이네. 오늘도 안 쓰러져서.”

“그거 확인하러 온 거예요?”

“응.”

 

백기가 픽 웃었다. “그리고 저녁 먹이러.” 하며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와……. 그건 뭐예요?”

“샐러드 도시락.”

 

백기는 유연이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후로 꼬박꼬박 퇴근 후 데리러 와서 저녁을 먹였다. 다이어트는 해도 좋지만 굶지는 말라면서. 유연은 종이봉투에 적혀 있는 상호를 알아봤다. 예약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유명한 가게 거였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선배, 고마워요. 이렇게 신경 써줘서…….”

“뭘.”

 

백기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간단히 대꾸했다. 아, 꼭 여자 친구한테 하는 것처럼.

 

“그, 그럼 갈까요? 우리 공원에서 먹어요.”

 

유연은 수줍은 얼굴을 돌리며 먼저 발길을 떼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걸어갔다. 해가 긴 여름날이라 여섯 시 반인데도 환했다.

 

씩씩하게 걸어가던 유연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달콤한 빵 냄새. 고개가 절로 끌려갔다.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힘껏 흡수하다가 잠깐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유연은 자신도 모르게 가게 문을 열고 있음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라 문에서 떨어졌다. 등 뒤에 있던 백기가 넘어질 뻔한 걸 잡아주며 말했다.

 

“새로 연 데 같네. 들어가 볼까?”

“아, 아니, 안 돼요. 이건 너무 큰 유혹이야.”

 

하면서도 차마 발길을 못 떼고 전면의 커다란 유리창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마치 파리의 아름다운 제과점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처럼 색색의 예쁘고 달콤한 것들로 가득했다. 탑처럼 쌓아 올린 오색의 마카롱과 봉봉 쇼콜라, 꽃처럼 화사한 포장된 누가와 프랄렌과 캔디, 시럽 입힌 반짝이는 과일을 올린 타르트와 케이크들. 거기만 반짝반짝 별세계 같았다. 유연은 신 포도를 바라보며 입맛 다시는 여우처럼 쇼윈도를 탐욕스럽게 들여다봤다. 아, 저 봉봉 하나만 먹을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나쯤은 먹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백기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연은 고개를 흔들며 “안 돼요.” 하고 대답하면서도 몸을 던져 유리창을 산산이 깨뜨리고 안으로 돌격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아, 안 돼. 그간 밀가루 금단 증상에 시달려 내 안에 다소 과격하고 폭력적인 경향이 생겨났다. 이러다간 선배한테 마구 짜증을 부리게 될지도 몰라. 힘들면 남자 친구에게 마구 신경질을 부리며 짜증을 퍼붓는 여자도 세상에 있다지만 유연은 그런 여자 친구가 될 마음이 없었다. 사실 아직 여자 친구도 아니니까 말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지만.

 

유연은 얼른 가게를 외면하며 말했다.

 

“빨리 가요, 선배. 아니면 내가 은행 강도처럼 저기 쳐들어가서 과자 다 내놓으라고 할 거예요.”

“……그래. 오늘은 가자.”

 

유연은 그의 팔을 붙잡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공원에 도착해 분수대를 바라보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백기가 봉투를 열고 도시락을 꺼냈다. 먹기 좋게 잘린 야채와 과일 위에 하얀 치즈 덩어리가 듬뿍 뿌려져 있었다. 뚜껑을 손에 든 채 백기가 변명하듯 말했다.

 

“리코타 치즈야. 이건 다른 치즈에 비해 지방 함량과 열량이 낮대. 영양가도 좋다니 너한테 꼭 필요해. 칼로리 걱정 말고 먹어.”

 

열나흘 간 치즈 종류는 엄격하게 입에 대지 않았던 유연이었지만, 배도 고프거니와 좋아하는 선배가 이렇게도 신경 써 주는 것에 마음이 사르르 녹을 수밖에 없었다. 유연은 “고마워요.” 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끄집어내며 선배가 건네주는 포크를 손에 쥐었다.

 

“별 말씀을.”

 

선배가 조금 웃었다. 거기서 안도의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이제나저제나 그 애가 안 먹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유연은 가슴이 빠듯하게 차오름과 동시에 수줍고 부끄러워졌다. 나는 선배가 정말…… 좋아.

 

선배도 나를 좋아할까?

 

나와 같은 마음으로.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는데…….

 

혀 위에서 녹는 리코타 치즈가 달콤하게 느껴진다.

 

“드디어 내일이네.”

 

그가 입을 열었다. 유연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음? 뭐가요?”

“동창회.”

 

그는 자기 몫으로 사 온 햄버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며 대답했다. “아.” 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드디어 내일.”

 

유연은 양상추를 포크로 콱 찌르면서 말했다.

 

“이 식단도 끝이 나는 거죠. 난 다시 태어나도 초식동물은 안 될 거예요.”

“그럼?”

“육식동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기만 먹어야지.”

“그래. 내일부터는 실컷 먹자.”

 

내일, 유연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

 

유연은 토끼처럼 샐러드를 아삭아삭 소리 내어 먹으며 벤치 아래서 다리를 달랑거렸다. 구두 신은 발끝에 백기의 시선이 닿았다. 사르르한 광채가 도는 연한 장미 빛깔의 새틴 구두.

 

“예쁜 구두 신었네.”

 

백기가 말했다. 유연이 방긋 웃었다.

 

“예쁘죠!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예쁘고 비싼 거예요.”

 

발끝을 쫑긋거리며 유연이 말을 이었다.

 

“근데 좀 아파요. 가죽이 딱딱한가.”

“아파?”

 

백기가 눈을 찌푸렸다. 유연이 얼른 말했다.

 

“괜찮아요. 밴드 붙이면 걸을 만해요. 구두는 원래 이런 과정이 필요해요.”

“……남자 구두는 안 그런데.”

“세상의 불합리한 점이죠. 여자 구두는 피를 먹고 자란대요.”

“무서운 얘기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유연은 그가 당장이라도 구두를 벗기고 자기 신발을 신게 할까 봐 얼른 말했다.

 

“지금은 못 벗어요. 길들여야 되니까.”

“왜?”

“동창회 때 신고 갈 거예요.”

“……다른 구두는 없어?”

“그날 입을 원피스에 이게 가장 잘 어울리거든요.”

 

유연은 이미 내일 입을 의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해 놨다. 헤어스타일부터 화장과 향수와 옷과 속옷과 구두와 가방과 가방 안의 내용물까지. 그날 유연은 세상에서 제일 예뻐질 것이다.

 

“……선배는 내일 일정 있어요?” 유연이 슬쩍 물었다.

 

“응. 업무가 남아서.”

 

그가 담담히 대답했다. 유연은 속으로 실망했다. 내 예쁜 모습을 선배한테도 보여주고 싶었는데. 나중에 동창회 끝나고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포크로 치즈 덩어리를 쿡 찍었다.

 

“잘 다녀와.”

 

백기가 말했다. 유연은 치즈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네!”

 

그날의 여왕이 되어 보일게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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